시그림책 <건축>은 시인 황인찬의 시와 작가 이지후의 그림이 만나서 만들어진 보물과도 같은 책이다. 하지만 오늘은 내가 그 시를 썼고, 내가 그림을 그렸다고 치고 후기를 남겨보고자 한다. 나는 김승일 시인이다. 내가 <건축>을 썼다고 치자. 내가 <건축>을 썼다. 건축을 썼을 당시 나는 아직 20대 청년이었다.
그리고 이 시는 시간이 오래 흘러 내가 죽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시는 이 문장으로부터 출발했다. 이 시를 쓸 때 내가 젊었기 때문인 것 같다.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시를 쓴다면 어떤 시를 쓰게 될까? 아마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시를 쓰게 되겠지. 항상 하던 얘기를 끝까지 반복하고 있을 거야. 했던 얘기를 끊임없이 반복해서 어떤 변화를 꾀하는 것. 그런 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나는 그냥 똑같은 얘기를 똑같이 할 거야. 징그러울 정도로. 나는 그냥 내가 얼마나 지긋지긋하고 징그러운 사람인지 보여주는 것에만 관심이 있어. 관심이 있어? 관심 같은 건 없어. 그냥 그게 내가 하게 된 일이야. 징그럽다. 징그러운 건 벌집. 말벌의 벌집.
숲길을 걸으면서 그가 결국 벌집을 깨트렸던 것을 떠올렸다 걸어갈수록 숲길은 더 어둡고 가끔 무슨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땐 내가 아주 젊었다. 11년 전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건축>을 썼다고 치니까 후회가 밀려오네. 나는 이제 젊어지려고 애쓰고 있다. 시 속에서 죽는 장면을 만들고, 그 장면에서 발화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내가 황인찬이라면 담담히 노화를 받아들일지도 모르겠지만. 황인찬이 담담히 받아들이긴 할까? 최근 황인찬은 내게 자기가 늙크크라고 했다. 우리가 늙크크라고 했나? 나는 나의 늙크크를 거부한다. 나는 젊어질 것이다. 내가 만약 건축을 다시 쓴다면,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건축을 썼다고 쳐야 하는데, 내가 건축을 썼다. 그리고 이 시는 시간이 오래 흘러 내가 죽는 장면으로 끝난다. 이 문장은…….
그리고 3개월이 흐른다.
이렇게 바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시그림책 <건축>의 그림을 그렸다고 쳐야 한다. 내가 그렸다. 내가 전부 그린 것은 아니지만 절반 정도는 그렸다. 아니다. 내가 전부 그렸다! 내가 이지후 작가다. 아니다. 나는 김승일이고, 대학생 때 애니메이션학과 수업이었던 그림책 만들기 강좌를 수강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선생님에게서 그림책 작가가 되기를 권유받았다. 너무 훌륭한 재능을 갖추고 있다고, 아주 유명한, 하지만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선생님께서 칭찬하셨다. 그래서 내가 <건축>의 그림을 그렸다. 황인찬은 자기 시에 내가 그림을 그린다고 하니 불쾌했을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건축>은 내가 쓴 시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치고 있기 때문에, 내가 그림을 그렸다.
나는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얼굴을 그림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검게 칠한 동그라미만 남겨놓았다. 결코 귀찮았던 것이 아니다. 누구나 몰입할 수 있도록 기표를 열어둔 것도 아니다. 여름의 화자와 겨울의 화자, 젊었을 때(아마도)의 화자와 죽기 직전의 화자를 구분할 수 없도록 검게 칠한 것이다. 똑같이 만든 것이다.
징그럽게 만든 것이다. 내가 이 시를 썼을 때 하고자 했던 일을 그림으로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물은 별로 징그럽지 않다. 하긴, 나는 내가 징그러운데 사람들은 다들 나를 좋아한다. 내가 시를 썼다고 칠 때에도, 내가 그림을 그렸다고 칠 때에도. 내가 진짜로 그렇게 믿을 때에도, 이게 다 무슨 개소리인지, 이 글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걱정을 하고 있을 때에도. 사람들은 나를 좋아한다. 나는 건축을 만든 사람. 내가 만든 건축은 무너지지 않는다.
나는 책의 표지에 무너지고 있는 건물을 넣자고 주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