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관 X 현재 평론가의 인터뷰 술 한잔 마셨습니다……
출판사가 잘 안되도 좋습니다
2026-03-22
유리관 X 현재 평론가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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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평론가가 『사명을 찾아서』를 읽고 유리관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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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업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
현재
우선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한 독자님들을 위해 이 책에 관해 간단히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유리관
‘출판사를 차리고 싶다. 출판사를 차리려면 먼저 출판사 이름부터 지어야 할 것 같다’ 하면서 출판사를 자리지 않고 계속 이름만 생각해내는 책입니다. 이 이름은 이런 뜻, 저 이름은 저런 뜻 하면서요.
현재
이 책은 단군 이래 호황인 적이 없었다는 출판 업계의 뒷사정을 다루는 내용이라서, 업계에 직간접적으로 몸담아본 적 없는 분들은 책의 내용에 공감이 좀 힘들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알라딘 100자 평에는 “에세이도 아니고 대체 이게 무슨 글이람”이라고 별점을 남겨주신 분이 계셨는데, 혹시 이 책을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가이드가 될 만한 방법을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영향받으셨거나 연계해서 읽어볼 만한 책이라든지요.
유리관
저도 그 평이 좋아서 공감을 눌렀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글인가 하면 가장 근접한 것은 소설 같네요. 재미라는 게 없다 하면 원체 한도 끝도 없는 거라…… 이 문제에 있어서는 쓴 사람이 재미 가이드를 착즙해 내놓기보다는 배드베드북스에 항의 메일을 보내시는 게 좋겠습니다. 전작 『교정의 요정』을 읽으시면 맥락이 더 이해될 수도 있겠지만, 그거라고 재밌으실까요? 모두 저의 모자람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곡물창고에서 연재되고 봄날의책에서 출간된 송승언의 『직업 전선』을 샤라웃해야겠습니다. 그 책은 뒤집힌 형태의 자전적 허구, 일테면 허구적 자전이라고나 할 것인데, 이와 같은 종류의 문학은 오늘날 인터넷 환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감히 우리라고 해도 된다면, 우리는 망상, 음모론, 썰, 악플, 서로 물고 물리는 주접과 억까, 과장광고 또는 광고 그 자체인 콘텐츠, 2차 창작, 여타 AI 쓰레기들과 나란한 인터넷-문학입니다.
현재
그런데 오히려 그렇다 보니 이런 업계 음모론 모음집 같은 글들이 독자로 하여금 이전에는 아무런 의문도 가져본 적 없던 분야에 새삼스레 어떤 의구심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 지금 여기서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구나…… 하는 감각이요. 전작인 『교정의 요정』도 마찬가지지만, 이런 맥락에서 유리관의 책은 약간의 픽션적인 모자이크 처리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현실적인 내용들을 다루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혹시 출판 노동자로서 업계에서 겪었던 가장 기이한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유리관
어디서나 뭔가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 뭔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곳이란 없다,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다…… 날이 갈수록 이런 생각이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만약 뭔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문제를 다른 곳에 외주로 넘기고 있다는 뜻일 겁니다. 이러한 문제들 전체 속에서 최선을 향해 몸부림을 치고 중지를 모으는 것, 그 중지를 모으는 방안의 고안이야말로 핵심적인 문제로 생각됩니다. 기이함으로 말하자면, 모든 일들이 지독할 정도로 평범했고 이 업계에서 겪은 그 어떤 일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위와 같은 뜻에서요. 그럼에도 가장 기이한 에피소드를 꼽자면 『사명을 찾아서』 출간이군요. 정말이지 이상한 일을 벌이고 말았다입니다.
현재
유리관의 화자는 가식 없이 솔직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잘 보면 결정적인 대목에서는 ‘삐-’ 처리하는 식으로 돌려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익명이나 초성으로 돌린다든지, 뭔가를 말하다 말거나 암시하기만 한다든지. 즉 99%만 솔직한 셈인데, 『교정의 요정』에서는 그 돌림의 대상이 어떤 원고나 저자였다면, 『사명을 찾아서』에서는 출판사 혹은 출판 업계 자체로 나머지 1%의 픽션의 정도와 층위가 더 심화된 느낌입니다. 편집자 노트에 따르면 이 책의 레퍼런스 중의 하나가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아메리카』 역시 일종의 돌려 말하기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볼라뇨는 『아메리카』의 마지막 장을 확장해서 『먼 별』이라는 장편 소설을 쓰기도 했잖아요? 혹시 『사명을 찾아서』에서도 장편으로 살려보고 싶으신 출판사가 있으실까요?
유리관
재밌는 질문입니다. 말씀하신 기준을 따라 훑어보니 「눈보라」, 「랑데부」, 「콘테나-추레라」 등입니다. 제가 작가적 방면으로 더 성실하고 능력 있었다면 장편으로 만들었을 것도 같은 편들은 대체로 시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 게으름의 소치입니다. 하지만 장편으로 쓴다 해도 재미없을 것 같아요. 짧기라도 해서 다행입니다. 문학은 그 성질상 꿈과 희망 또는 그 비슷한 것(?)들을 어쨌거나 파는 것이니 ‘망하게 둘 수는 없다’인 한 그 안에서 뭘 터놓고 얘기한다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문학 밖에서 말할 수는 있을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쪽에서 보면 문학에는 어떻다저떻다 말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우리는 ‘이미 망했다’이고, 이미 망했다는 꿈을 팔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문학만이 파는 꿈조차 아닙니다. 언데드 꿈이군요. 이런 꿈속에서는 살린다는 말의 뜻이 묘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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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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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을 찾아서』는 근무시간에 짬짬이 쓰신 글들을 모아 낸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또 책 만드는 일을 달가워하시지 않는다고……. 일하기 싫을 때 몰래 쓰는 글이 제일 꿀맛이라면, 즐겁게 쓰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하고, 또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다시 저 악의 축 같은 출판사들이 존재해야 합니다. 일종의 금기와 위반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사명을 찾아서』라는 제목부터가 이런 역설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출판 노동자로서 자신을 억압하는 기업체의 해체가 아니라 오히려 설립을 기획하고 있으니까요. 실제로 유리관의 위반은 파업이 아니라 태업의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이 책의 화자들은 매사 툴툴거리면서도 막상 책상 자리를 뜨지는 않습니다. 대신 딴짓을 하면서 무언가 자신이 맡은 업무와는 다른 가치들을 만들어 내죠. 심지어 그런 방식으로 은근히 성실해 보이거나 유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 책 자체도 그런 식으로 쓰인 셈인데, 파업이 혁명의 가능성을 믿는 노동운동이라면, 태업은 그러한 가능성을 믿지 않는 위반으로서 출판사 내부에서부터 붕괴를 가속하는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일종의 역설이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분을 사장으로 만나면 일하기는 편하겠다 싶었어요. 왜 흔히들 유능한데 일하기는 싫어하는 상사가 최고의 상사라고 하잖아요. 본인이 출판사를 차린다면 사장으로서의 유리관이 원하는 사원은 어떤 사람일까요? 말하자면 『사원을 찾아서』의 한 편이 궁금합니다. 당장에 떠오르는 또 다른 작품 속 캐릭터를 예로 들어주셔도 좋습니다.
유리관
친구들과 하던 농담 따먹기로 ‘내가내가 ○○○이라면’ 놀이가 있습니다. 내가내가 사장님이라면? 내가 사장님 되면 오침 시간 두 시간 보장, 사장님이라면 사무실 배변 패드 무제한 제공, 사장님이라면 입구에 도마뱀 사육장…… 뭐 그런 소리를 늘어놓는 겁니다. 『사명을 찾아서』를 완전히 해부해보면 그런 것도 나온다는 건데요, 제가 항상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갑자기 딴소리 같지만, 파업도 태업도 모두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필요합니다. 자본을 제외하면, 거의 아무것도 배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침도 배변 패드도 사육장도 다 필요합니다. 심지어 사장님조차 필요합니다. 사장님은 그야말로 화급히 해방되어야 할 존재입니다. 자본으로부터요. 사장님이라는 존재가 자본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 한, 어떤 사람을 사장님으로 찾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붕괴도 보수도 재건도 다 좋습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배제할 만한 것은 오직 자본입니다. 제가 믿지 않는 단 하나는 자본의 가능성입니다. 그건 불가능 그 자체입니다. 그거야말로 믿지 않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현현이라는 방식으로 아무런 믿음도 요구하지 않는 신앙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혁명이 과정이라면, 자본을 배제한다는 것이 실질적으로 어떤 형태일지를 현실 속에서 알아내는 과정입니다. 즉 내가내가 사장님이라면, 제가 원하는 사원은 저를 자본으로부터 해방시켜줄 사원입니다. 그런데 그건 실질적으로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일단 그 사원이 사원됨을 초과해야만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흔히 ‘회사에 대한 주인의식’을 말하곤 합니다. 그것조차 물론 필요합니다. 다만 그런 맥락에서라면 그 사원의 주인의식은 회사라는 범위를 아득히 초과해야 합니다. 지역의, 나라의…… 아니면 세계의 주인이라면? 그 대악당 사원은, 그것은 일개인으로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한 종족만으로도 이룰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사원들…… 무한정의 사원들입니다!
현재
미국에는 다른 출판사들이 꺼리는 책들만 골라서 내는 스카이호스Skyhorse라는 출판사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가령 캔슬된 작가들만 모아서 출판한다든지. 왠지 『사명을 찾아서』에 등장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출판사인데, 혹시 국내외로 주목하는 실제 출판사가 있으실까요?
유리관
『사명을 찾아서』는 출판의 내용과 사업 방식 사이의 틈새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이디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안 좋은 쪽으로의 실례들은 많습니다. 진보적 내용의 책을 만들면서 출판노동자에 대한 뭐는 어쩌고 하는 식으로요. 그러나 그런 건 저열한 현실에 대한 식상한 접근입니다. 저는 현실을 꼬집으려는 게 아닙니다. 현실이 같이 꼬집힐 수는 있어도 별로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쓰레기들을 만드는 출판사들이 있듯 좋은 책을 내는 출판사들도 있습니다. 나쁜 출판사에서 좋은 책이 나올 수도 있고, 좋은 출판사에서 형편없는 책이 나올 수도 있고……. 질문이 뭐였죠? 최근 주목되는 출판사는 ‘좋은책신사고’라는 곳입니다. 문자 그대로 ‘사장님이 미쳤어요’인데 너무 자세히 쓰면 행여나 배드베드북스에 해가 될까 두렵군요. 언론노조 좋은책신사고지부 투쟁 승리를 기원합니다.
현재
그 무엇도 출판하지 않고 사명으로만 존재하는 출판사의 의의는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책으로 묶여 나왔다는 게 한편으로는 어딘지 모순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처음 출간 제의를 받으셨을 때 어떤 거리낌이나 망설임은 없으셨을까요?
유리관
아무래도 배드베드북스와 가까운 사이다 보니 이거 책으로 만들어도 팔릴 각이 안 나오는데, 싶어서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름의 각오가 있으니 하려는 것일 테고……. 제 입장에서야 마다할 사정 없지요.
현재
때로는 흥하는 것보다 훌륭하게 실패하는 게 관건이잖아요. 『사명을 찾아서』의 가상 출판사들도 한편으론 어떻게 해야 ‘잘’ 망할 수 있을지를 시연해 보이기 위해 기획된 것 같기도 합니다. 어쩌면 배드배드북스도 언젠가는 망할 출판사인데(불길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사람은 언젠가는 모두 죽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배드베드북스의 마지막 한 장면을 묘사해주세요.
유리관
세상일이란 정말이지 모르는 것입니다. 배드베드북스는 그 창립자들의 생각보다 오래 이어집니다. 그들이 모두 죽은 다음, 심지어 그들로부터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사업을 이어받은 이들마저 죽은 다음까지 이어지리라고는, 창립 당시에는 전혀 예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처음 100년 동안 배드베드북스는 멋진 책들을 많이 냈습니다. 더 이상 인간이 운영하지 않게 된 뒤에도 괜찮은 책들이 꽤 나왔고요. 마지막 100년 동안에는 그래도 한두 권 정도 재밌는 책을 냈습니다. 마지막 책은 수학-미술-곤충과 관련된 것으로, 현재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렵고 이해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예닐곱 명의 독자를 만들었던 그 책을 끝으로 배드베드북스는 박물관(같은 것)에 등록되며, 그 후 언어로 닿는 세계가 끝나는 날까지 60회가량 참조됩니다.
현재
그건 그렇고, 구걸 행위가 경범죄인 걸 책을 읽으면서 이번에 처음 알게 되었어요. 지금 홍보를 위해 애쓰시고 계시는 대표님을 위해 살가운 응원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유리관
‘구걸 행위’는 여전히 경범죄지만 ‘떠돌이, 덮개 없는 음식물 판매, 유언비어 날조유포, 장발 및 저속의상, 굴뚝 등 관리 소홀, 전당품장부 허위기재, 비밀춤 교습 및 장소 제공, 뱀 등의 동물을 진열하는 행위’는 더 이상 죄가 아닙니다. 떠돌이가 죄가 아닌 것만 해도 숨통이 좀 트입니다. 영 안되면 같이 비밀춤 교습이라도 합시다. 배드베드북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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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으로 써보고 싶은 편이 있냐는 내 질문에 유리관은 「눈보라」, 「랑데부」, 「콘테나-추레라」을 꼽았다. 그러나 내가 기대하는 유리관의 소설은 「낱획」에서 출발한다. 거기에는 말 안 듣는 교수새끼들과 그들의 원고를 손에 쥔 복수심에 가득 찬 교정공, 가난한 사람들과 부자인 사람들, 튼튼한 침대와 망가진 침대, 그리고 강한 사람들과 약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못난 놈들 좋은 놈들 모두 다 같이 등장하는 것이다. 잘 먹고 잘사는 부자인 사람들이 비싸고 튼튼한 침대에서 잠도 잘 자서 계속 더 강하게 사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고 대체로는 너 나 할 것 없이 엉터리로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소설에서는 대체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소설에 비극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등장인물 모두가 하기 싫은 일을 어쩔 수 없이 억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유리관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거는 꼭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은 아니고 가끔은 그가 하기 싫은 일을 자진해서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에게는 빚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유리관은 그가 일이 하기 싫어서 딴짓하면서 쓴 글들을 책으로 내주겠다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있다. “정말 내 글을 책으로 내도 괜찮겠습니까? 안 팔릴 텐데요.” 그 역시 긴가민가하면서 일단은 제안을 감사하게 받아들였지만 사실 또 그렇게까지 감사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여러 가지 부담감을 함께 떠안았기에 원하지도 않은 빚을 진 것 같았는데, 어쨌든 그는 이 빚을 갚기 위해 더 재미있고 더 감동적이며 더 많이 팔릴 글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은 했지만 잘되지 않자 그 순간부터 문학은 그에게 형벌이 되었다. 이미 형벌이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더 가혹한 형벌이 되고 만 것이다. 그는 이제 쓰고 싶어서 쓴 글들마저도 하기 싫은 일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쓰기 싫은 글을 쓰기 싫어서 쓰기 싫은 글들을 쓴다, 또 그리고 하기 싫은 일을 하기 싫어서 하기 싫은 일들을 한다…….’ 그의 삶에는 더 이상 딴짓이라고 할 만한 일들이 불가능해졌고, 일종의 형이상학적인 채무 속에서 그는 점차 진정한 작가가 되어갔다. 그는 이후 다섯 권의 소설을 더 펴낸다. 마지막으로 출간된 작품은 그가 언젠가 일이 하기 싫어 재미 삼아 썼던 「낱획」이라는 한 문단짜리 짧은 소설을 장편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 소설에서는 못난 놈들 좋은 놈들 모두 다 같이 등장한다. 그 소설 속 세계는 대체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 누군가 빚을 지면 그 빚을 갚으면서 또 빚을 주고 하는 식의 품앗이로 아주 조금씩 변해간다. 그 소설은 진짜로 재밌고 진짜로 감동적이며 진짜로 많이 팔렸다고 한다. 그러나 유리관이 그 사실에 만족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소설의 제목은 『상부상조』다. 그리고 이 소설은 이미 쓰였다.
강한 것들이 이룬 세계의 변화는 대부분의 경우 우리에게 별로 좋을 것도 없고 많은 경우 나쁘다는 점에서 대체로 별 볼 일 없는 시시한 것이다. 하지만 약한 것들이 이뤄내는 세계의 변화는 우리의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이해와 필연적으로 합치하기 마련이기에 극히 중요한 것이다. 약한 것들이 대체 어떻게 해야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을지를 상상해본다면, 이 중요성의 차이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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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2023년 문학과사회에 평론을 발표하며 활동을 시작했다.
유리관
일해야 한다, 일하고 싶다, 일하기 싫다 사이에서 흔들리는 출판노동자. 생계 외 마음의 보전을 위한 취미로 읽기와 쓰기를 하며, 문예계 팀 블로그 곡물창고(gokmool.blogspot.com)에서 사이버 창고관리인으로도 일하고 있다. 일기집 『교정의 요정』(민음사, 2024), 미친 책 『사명을 찾아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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